Friday, February 05, 2016

선의 진부성The Banality of Good


선의 진부성(The Banality of Good)
나의 새해가 사실상 <<이상문학상 수상집>>으로부터 시작한 것은 대학시절부터다. 매년 1월이 되면 적어도 세 번은 동네 서점에 들러 출간을 기다려야 손에 쥘 수 있는 책이다. 유학시절에도 해외주문(?)을 통해, 1월의 어느 날 새해 의식을 치르는 마음으로 표지부터 한 장 한 장 넘겼던 기억들이 나의 열정(passion, 그러니까 내면화된 아픔)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한참 문학공부를 할 때는 감식안에 의해 걸러진 완성도 있는 작품들일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러는 사이 독서의 폭이 좁아지면서 어느덧 한 해에 구입하는 유일한 한국어 책이 돼버렸고, 한동안은 한국소설의 새로운 감수성을 따라잡기 위해 읽다가 이제는 변화하는 한국어 감각을 주목하며 읽는다. (여담이지만 한국어 문체를 망가뜨리는 주범은 바로 생각 없이 언어를 구사하는 학자들임을 알아챈 요즘은 한국어 논문은 심사조차 피한다. 오히려 내용은 빈약할지라도 톡톡 튀는 언어감각의 학생들이 쓴 텀페이퍼가 나를 훨씬 들뜨게 한다.)
이번 40회 이상문학상 수상집에 실린 작품들은, 돌이켜보면 한동안 영 개운치 않았던 실험 단계를 벗어나 소위 '탄탄한 서사구조'의 경지를 보인다. 리비스(FR Leavis)가 제시한, 이야기로 완결되지 못한 작품은 결국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지루함'에 이른다고 한 진단에서도 말끔히 벗어난다. 엘리엇이 25세가 넘어서도 시를 쓸 수 있으려면 '역사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때 역으로 우리는 누구나 한 때 시인이기도 하고 소설을 쓸 수도 있다고 이해된다. 이제 더 이상 시도 쓸 수 없고 소설가도 아닌 우리에게서 이 시대에 잘 된 작품들이 섬광처럼 역사의식을 일깨운다.
금년 수상작 중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은 통렬하다. 보통의 우리와는 정반대로 과거는 흐릿한 여러 갈래의 가능성으로 느끼지만 먼 미래조차 명확한 모습으로 '기억'하는 주동인물의 설정이 알레고리임을 일깨운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이 이웃의 선한 사람은 자신의 손녀가, 잊을 만하면 다시 터지는 대형참사에서 죽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혼하고 아이 낳고 정해진 길을 가듯 하루하루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의 운명은 기시감으로 다가온다. 그의 딸, 그러니까 죽은(아니, 죽을) 손녀의 엄마는 말한다, 자기 때문에 아이가 죽었다고! 이유인즉, 2년 전 비슷한 사고로 많은 아이들이 죽었을 때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걸 절대 다행으로 여기지 않고 당한 사람의 마음으로 살겠다고 속으로 '생각만 했을 뿐'인데... 그녀는 울부짖는다.'제가 그 생각을 한 게 잘못된 거예요? 그렇죠? 그게 잘못이죠?'(251) 미안해서 동정도 할 수 없었던 종류의 불행이, 기껏 동정 이상이라고 보였던 반응이 자신의 현실로 되돌아오자 위악으로 맞선다. 그런 생각조차 못하는 무관심에 대비돼 말이, 아니 생각이 씨가 되는 삶이다! 섬뜩하다. 우리 사회는 무관심보다는 이런 선한 '생각'의 이웃이 절대 다수를 이룬다. 그런 사회의 미래를 뻔히 '보면서' 오늘도 '생각만'으로 꾸역꾸역 살아가는 우리는 도대체 어떤 군상인가? 젊은 작가 윤이형은 화가 나있지만 그의 단단한 언어는 냉정하다.
새해 2016(정확히는 2015) 어떤 예민한 더듬이가 포착한 우리의 모습은 무관심도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보통사람의, 아무 새로울 것도 없고 아무 놀라울 것도 없이 진부하기 그지 없는 선(the banaliy of good)의 모습이다. 그해 4월 많은 아이들이 살아 돌아올 수 없음이 점점 분명해지기 시작할 때 나도 한 주 동안 매 번 수업마다 존 던(John Donne)의 종교적 명상문("Meditation XVII")을 학생들과 함께 읽음으로써 부지불식 간에 그 진부한 선을 실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