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Free verse; Vers libre)
A.
전통적인 의미에서 시가 압운체계(rhyme scheme)와 명시적 운율(meter)을 바탕으로 하지만, 자유시는 무압운, 비운율의 ‘열린 형식’의 시이다. 자유시란 운율시(metrical verse)의 파생 장르(즉, 시)이면서도 ‘운율 피하기’(즉, 자유)라는 의미에서 용어상 모순이지만 동시에 다양한 작시법이 혼합된 형태이다. 자유시는 시의 일반 규칙과 제약을 거의 받지 않고, 그 시적 효과를 주로 개별적 리듬과 불규칙해 보이는 시행에 의존한다. 자유시는 압운체계가 없다는 점에서 무운시와 유사하지만, 무운시와는 달리 약강5음보의 운율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또한 자유시는 행 배열이외에는 산문과 본질적 차이가 없지만, 압운이 없지만 내재율을 가진 운문이라는 점에서 산문체 리듬에만 의존하는 산문시(prose poems)와도 다르다. 자유시는 기본적으로 시행이 리듬 단위이며, 규칙적 음보와 뚜렷한 압운이 없기 때문에 구문이나 억양과 같은 내적 논리에 따라 유기적으로 구성된다. 연 구성 또한 의미 단위로 이뤄짐에 따라 길이가 제각각이고 시각적으로 특이해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 결과 자유시는 극단적으로 다양한 형태를 띠는데, 이를 통해 실제 삶의 경험을 보다 사실적으로 재구성한다. 삶의 지각, 인식, 정서, 상상의 과정을 복제, 투사, 재현 하려는 자유시 정신이 시인과 독자를 끊임없이 매료시키는 요소이다. 즉, 자유시는 정해진 형식이나 외적 규범이 없어서 시인의 개성이 보다 분명히 확보되고, 시의 속도, 강세 등을 창출하기 위해 독자의 개입이 보다 적극적으로 요구되는,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유형의 시이다.
B.
자유시는 인류의 구어 전통에 바탕하여 규칙적 운율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세계 문학사상 일찍부터 발견되는 가장 오랜 시 형식 중 하나로서, 서정시 전통에 그 맥이 닿아있다. 민족에 따라 서로 다른 역사적 조건을 갖고 있는 만큼 그 스펙트럼이 넓고 운율 배경도 다양하다. 그럼에도 자유시는 압운체계와 운율형식이 지배해온 문학사에서 오랫동안 억압되어 오다가 20세기 이미지즘, 아방가르드 같은 모더니즘 자유시로 ‘억압의 귀환(the return of the repressed)’을 이뤄낸다. 용어상 자유시는 엄격한 전통운율로부터 부분적으로 자유로워진, 17세기 프랑스 라퐁텐(La Fontaine)과 그의 동료들의 해방된 시(vers libéré)를 기원으로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시라는 명칭은 대체로 파격적 기법으로 불규칙한 운율을 시도한 귀스타브 칸(G. Kahn)이나 쥘 라포르그(J. Laforgue) 등과 같은 19세기말 프랑스의 시인들의 시작 활동에서 기인한다. 영어권에서 자유시는 오래전부터 비하의 표현으로 쓰이다가 20세기 초 문학운동의 구호로 등장한 후 중립적인 기술어(記述語)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영문학에서 현대적 의미의 자유시는 이미 1611년 흠정역 성경(the King James Bible)에 나타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그중 시편(Psalms)과 아가서(the Song of Solomon)는 고대 히브리 시가의 병행구조와 카덴스(cadence)를 산문 영어로 모방한 것이다. 특히 시편은 1380년대 위클리프(J. Wycliffe)이래 오늘날까지 다양한 형태의 자유시로 번역돼왔다. 이와 같은 성경의 문체는 18세기 중반 크리스토퍼 스마트(Ch. Smart)의 장편 자유시 『어린양을 기뻐하라』등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자유시는 19세기 많은 영미 시인들의 형식실험을 통해 발전된다. 윌리엄 블레이크(W. Blake), 매슈 아널드(M. Arnold) 등은 규칙적 음보에서 벗어난 문체를 구사하고, 크리스티나 로제티(Ch. Rossetti), 코벤트리 팻모어(C. Patmore), 브라운(T. E. Brown) 등은 정해진 격식이 없는 압운시를 시도했다. 그중에서도 미국시인 월트 휘트먼(W. Whitman)은 현대 자유시의 중요한 선구로 알려진 비운율시 『풀잎』을 썼다. 그의 문체 역시 성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특히 강세와 음절수의 규칙을 무시한 다양한 길이의 시행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는 구어에 바탕한 형식을 통해 예기치 못한 곳에 강세를 둘 뿐 아니라 문법적 강조, 평행구조, 전후 조응(anaphora, 특히 첫머리 어구반복), 산문처럼 긴 시행 등을 영시에 되살렸다. 반복되는 음보를 통해 리듬효과를 창출하는 전통시와는 달리 그는 특정 낱말, 구, 절, 시행 등 의미 단위의 반복, 균형, 변주 등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휘트먼 이후 영어권 자유시는 대체로 번역 성경에 기원한 긴 시행으로부터 짧은 대화체로의 이행 과정이었다. 그밖에도 전통적 작시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낭만주의 이래 대부분의 서구 민족문학의 주요 경향을 이룬다. 러시아의 수마로코프(A. P. Smarokov), 푸시킨(A. S. Pushkin), 독일의 괴테, 횔더린(F. Hölderlin, 프랑스의 랭보(A. Rimbaud), 아폴리네르(G, Apollinaire) 등이 민족 고유의 운율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난 시를 썼다. 특히 독일의 하인리히 하이네(H. Heine)는 연작시 「북해」를 통해, 그리고 랭보는 산문모음집 『일루미나시옹』을 통해 자유시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오늘날 자유시는 대체로 19세기말 프랑스의 상징주의시와 1차세계대전 전후 아방가르드 자유시를 의미한다. 이 시기의 자유시는 자의식적이고 자기선언적이며 운율에서 보다 철저히 자유로워지려는 시도였다. 20세기 초 영어권의 이미지즘 시인들은 습관적으로 시행과 문법적 단위를 일치시켰고, 이 운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에즈라 파운드(E. Pound), 엘리엇(T. S. Eliot) 등도 다양한 형태의 자유시를 실험했다. 이후에도 앨런 긴스버그(A. Ginsberg)나 로버트 블라이(R. Bly)의 목록시(the catalog verse), 칼로스 윌리엄즈(W. C. Williams)의 변동음보(the variable foot) 이론, 찰스 올슨(Ch. Olson)의 투사시(the projective verse) 등을 통해 자유시를 실천하고 또한 이론적으로 옹호했다. 문학사에서는 아방가르드 자유시는 불어권의 랭보, 브르통(A. Breton), 에메 세자르(A. Césaire) 등과 칠레의 스페인어 시인 파블로 네루다(P. Neruda), 영어권의 찰스 톰린슨(Ch. Tomlinson) 등이 대표한다.
20세기 자유시는 그 다양성 때문에 일반화할 수 없다. 그럼에도 많은 유형의 자유시에는 운율시 못지않은 규칙성이 존재하는데, 전통시와의 차이점은 단지 그 규칙이 개별시의 언어와 텍스트 논리에 바탕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자유시는 내재율이 지배적이지만, 시인들은 필요에 따라 해방된 형식을 통해 운율시와 자유시 사이를 수시로 넘나든다. 심지어는 20세기말 신형식주의로 알려진 몇몇 시인 비평가들처럼 전통적 작시법의 음보, 압운, 연 형식 등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C.
자유시는 그 대중성과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지적도 있다. 실제 시작 과정에서 특별한 형식적 제약이 없고 개별적, 내적 통제에 따라 전개되는 자유시가 갖는 곤경을 프로스트는 “네트 없이 테니스 치기”(playing tennis without a net)라는 은유를 통해 드러낸다. 그러나 자유시가 여전히 시로 인식되는 한, 나름의 구조와 리듬을 가지며 전통적인 운율시의 경우와 동일한 용어 및 방법으로 논의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엇의 지적처럼, “시를 잘 짓고자하는 자에겐 어떤 시도 자유롭지 않다”고 할 것이다. 자유시는 외부에서 주어진 규칙이 없다 해도 여전히 어구반복, 약하나마 압운, 평행구조, 대조, 콤마 등을 통해 반복과 반향을 일으켜 리듬을 형성하고, 유사한 이미지나 낱말을 나열하여 음악적 효과를 내기 때문에 문장강세 운율(intonational metre)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자유시는 운율 규범의 의도적 배제와 문장을 문법 혹은 의미단위로 분절한 시행을 주요 특징으로 한다. 또한 자유시에서는 구조상 반복 못지않게 일회적 우연성이 중요하며, 시적 효과를 문법과 서로 다른 길이의 시행이나 연 사이의 긴장에 의존한다. 그 결과 자유시는 주어진 규범보다는 개별 시의 임의적 요소가 부각되고, 주로 청각에 기대는 정형시와는 달리 시마다 서로 다른 시각적 공간을 창조한다. 자유시는 시형식을 유지하면서도 시마다 독특한 형태와 예측 불가능한 구조의 역동성을 통해 한편으로 시 장르의 연속선상에서 놓이면서 다른 한편 수사적 측면에서 끊임없는 ‘낯설게하기’를 시도한다.
대부분의 자유시는 전통시처럼 시행의 관행을 따르지만, 시행의 길이를 규제하는 원칙이 없기 때문에 서로 다른 길이를 통해 다양한 효과를 창출한다. 문법, 의미, 시각 단위의 어구로 시행을 구분함으로써 일률적인 정형시행의 단조로움을 벗어나 보다 짜임새 있는 구성이 가능하다. 반면 상투적 문법, 의미, 시각 단위 안에서 시행갈이를 폭력적으로 시도하는 경우는 전치사나 조사와 같은 기능어를 강조하여 파편화 혹은 탈자동화된 불연속적 읽기를 요구한다. 대체로 짧은 시행이 단절효과를 일으켜 흐름을 조절하고 무게를 보태는 반면, 긴 시행은 5음보 같은 전통적 시행의 한계를 넘어서는 탄력을 준다. 길이가 짧든 길든 등가의 시행으로 이뤄지는 자유시에서는 대체로 어떤 두 행의 길이도 일치시키지 않는데, 확장된 서사시나 짧은 서정시에서 긴 시행과 짧은 시행을 교차시켜 대화적 효과를 낼 수 있다.
자유시에서는 시어 또한 소리와 시각효과로 풍부한 의미를 형성하지만, 그 효과는 대체로 일회적이다. 가령 자유시에 압운이 나타난다 해도 시 전체 구도로서가 아니고 단어와 시행의 중간처럼 예상치 않은 곳에서 우연적 상황으로 종종 발생한다. 반면 자유시는 시각적 효과를 위해 한 페이지 전체에 걸쳐 시를 배치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말라르메(S. Mallarmé)는 『주사위 던지기』에서 새의 깃털모양을 제시하기 위해 펼칠 수 있는 확장된 페이지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 경우 여백이 텍스트를 둘러싼 공간으로서 멈춤, 분리, 침묵의 이미지 등을 창출한다. 또한 자유시에도 다른 시의 경우처럼, 인쇄 기술과 새로운 시각 매체의 발전으로 시각적 장치에 영향을 받아왔다. 자유시는 타자기 자판이나 조판 상 가능한 상징이나 문자를 이용함으로써, 실제로 운율파악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운율을 파괴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Meyer Howard Abrams, Geoffrey Harpham, A Glossary of Literary Terms, Thomson Wadsworth, 2005.
Antony Easthope, Poetry as Discourse, Methuen, 1983.
Thomas Stearns Eliot, “Reflections on Vers Libre” Selected Prose of T S Eliot, Ed. Frank Kermode, Faber 1975.
Harvey Seymour Goss, Sound and Form in Modern Poetry, U of Michigan P, 1964.
Alex Preminger, Terry Brogan et al (eds.), The New Princeton Encyclopedia of Poetry and Poetics, Princeton UP, 1993.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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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 believe that you nеed to ωrіtе more аbout this tοpic, it may
not be а taboo subjeсt but uѕually people don't discuss such subjects. To the next! Many tha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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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자유시가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시형식이다(또는 그렇게 여겨진다.)"라는 의견에 대한 선행연구를 하다가 여기로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참고문헌 중 어느 책에서 나오는 건지... 혹시 기억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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