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ly 24, 2012

무운시(無韻詩; blank verse; vers blanc)

A.
일반적으로 시의 두 요소가 운율(meter)과 압운(rhyme)이라면, 무운시는 독특하고 고유한 운율은 있지만 압운이 없는 정형시다. 압운은 나름의 장점과 아름다움이 있지만 실제 시작(詩作)에서는 운율 구조를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 무운시는 압운체계가 없다는 점에서 자유시와 유사하지만 운율이 드러나지 않는 ‘열린 형식’은 아니라는 점에서 자유시와 구별된다. 원래 이탈리아 시에서 제한요소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던 무운시는 영시에서는 문자 그대로 압운의 부재만을 의미한다. 무운의 약강5음보(iambic pentameter) 운율에 바탕한 무운시는 영시 전통에서 16세기 이래 가장 보편적이고 영향력 있는 시형식이다. 실제로 영시 전체의 3/4 정도가 무운시로 알려졌는데, 다소 느슨한 형태까지 고려한다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일상의 구어에 가까운 리듬의 무운시는 시극이나 서사시, 또는 장편 명상시에 주로 쓰인다.

B.
무운시는 이탈리아 11음절시(endecasillabo 또는 hendecasyllables) 가 압운 없는 형태로 변형돼 르네상스 시대에 처음 등장한 뒤 영국에 전해져 무압운 10음절 약강5음보 시로 정착했다. 무운시의 운율은 고전시대 약강 3음보에서 기원하는데, 고전시가인 영웅 서사시의 6음보의 어조와 중량감을 르네상스 이후 유럽문학에서 민족어로 표현하려는 일종의 모더니티 기획이었다. 이탈리아 문학에서 11음절시는 압운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반행마다 한 번의 강세를 두었으며 때로는 9, 10음절의 시행도 허용했다. 그러나 11음절시는 당시 매우 대중적이고 문학사상 획기적인 성취였지만 이탈리아 문학의 주요 시형식으로 떠오르지는 못했다. 프랑스 등지에서도 이탈리아의 무운 시작에 영향을 받아 나름의 실험을 시도하지만 낱말 강세(word-accent)가 미약한 언어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반면, 영국에서는 셰익스피어와 밀튼(J. Milton)의 성취로 운문극의 중심 운율로 부상하고 시문학 전반에서 표준양식이 되었다.

영시에서 무운시 논의는 사실상 르네상스 이후 영시의 역사에 대한 논의에 다름 아니다. 무운시는 16세기 중반 와이엇(T. Wyatt) 경과 함께 이탈리아 정형시 소네트 형식을 영국에 도입했던 서리 백작 하워드(H. Howard가 시도한 베르길리우스의『아이네이스』번역에서 비롯한다. 그는 이탈리아의 몰자(Molza)가 『아이네이드』의 번역에서 구사했던 ‘압운을 무시한 자유로운 시’(versi sciolti da rima)를 모방했다. 그러나 서리 백작은 무운시의 도입 당시부터, 이탈리아 11음절시와는 달리, 매 시행마다 10음절과 약강으로 교차하는 강세를 엄격히 지켰다. 이는 이미 150여년 전 초서(G. Chaucer)가 10음절 시행을 정착시킨 전례를 따른 것이지만, 15세기 중반 음운체계의 변화로 인해 초서의 운율이 상실된 후라서 그가 일상 영어의 자연스런 리듬에 가장 가까운 약강 음보를 처음 시도했던 것이다. 뒤이어 새크빌(T. Sackville)과 노튼(T. Norton)의 비극 『고보덕(Gorboduc)』에서 단조로운 무운시를 구사한 이래 말로우(C. Marlowe)와 셰익스피어가 무운시를 극형식으로 확립했다. 셰익스피어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와 어조로 대부분의 모든 인물들의 대사를 약강5음보의 무운시로 씀으로써 그 가능성을 확인했다. 또한 시문학 분야에서도 밀튼이 『실낙원』을 비롯한 모든 서사시를 무운시로 쓴 이래 주된 시형식이 되었다. 그는 무운시의 유연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복잡한 구문구조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1660년 왕정복고 이후 극문학에서 희극은 주로 산문으로 쓰였지만 비극에서는 여전히 무운시가 18세기까지 이어졌다. 시문학에서는 17세기와 18세기 초에 영웅시격2행연구(heroic couplet)가 유행하자 무운시는 일시적으로 침체했지만 18세기말부터 다시 낭만주의 시인들과 빅토리아조 시인들에 의해 주요 형식으로 채택된다. 먼저 18세기말 자연시의 선구인 톰슨(J. Thomson)이 밀튼을 모방하여 대부분의 장시를 무운시로 구사함으로써 낭만주의 시 혁명을 이끈다. 워즈워스(W. Wordsworth)는 자전적 서사시 『서시』를 비롯한 주요 작품에서 보다 개인적 어조와 구어체를 무운시로 구현하고, 브라우닝(R. Browning)이 『반지와 책』등에서 구사한 극적 독백이 모두 낭독 어조와 일상의 구어 리듬을 무운시로 포착한다. 테니슨(A. Tennyson) 또한 『왕의 목가』등을 무운시로 썼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많은 시인들이 자유시로 전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이츠(W. B. Yeats), 파운드(E. Pound), 엘리엇(T. S. Eliot), 오든(W. H. Auden), 프로스트(R. Frost), 스티븐스(W. Stevens) 등 주요 시인들이 무운시의 전통을 이었다. 특히 프로스트가 장편서사와 대화시에서 의미의 소리를 포착하기 위해 무운시를 성공적으로 구사한 반면, 엘리엇은 느슨한 무운시 『황무지』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무운 시극의 시도에서는 자의식적이고 시대착오적 느낌이다. 이처럼 영시에서 무운시는, 그 변형된 유형까지 고려하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두드러진 시형식이라 할 것이다.

무운시는 영시 이외에도 18세기 후반 독일 시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뒀다. 비란트(C. M. Wieland)가 비극 『귀부인 요한나 그레이』를 무운시로 쓴 이래 레싱(G. E. Lessing)의 『현인나탄』이 가장 영향력 있는 무운 시극이 되었다. 괴테는 자신의 산문작품 『타우리스섬의 이피게니에』와『타소』를 무운시로 다시쓰기를 시도했고, 쉴러(F. Schiller)는『돈카를로스』를 무운시로 썼다. 쉴레겔(F. von Schlegel)은 무운시로 쓰인 셰익스피어를 번역함으로써 무운시의 틀을 확립했다. 독일의 무운시는 바이마르 고전주의의 표현 형식으로서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19세기 내내 독일 시극의 표준 운율이 되어 호프만스탈(H. von Hofmannsthal)의 서정시극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는 릴케(R. M. Rilke)가 『두이노의 비가』의 일부를 무운시로 쓴 이래 서정 무운시는 점차 자유시로 대치되고, 무운시극은 산문으로 대체된다. 그때부터 전통적 무운시 운율은 배경으로만 가끔씩 모습을 드러낸다. 그 밖에 무운시는 러시아에서도 일정한 성취를 이뤘는데, 쉴러의 극작품 번역에서 처음 도입된 이래 푸시킨(A. Pushkin)이 성공적으로 구사했으며, 그 이후에도 서사와 성찰시에서 자주 나타난다.

무운시는 고전시대 서사시를 뒤이은 운문양식으로서,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하여 심화되는 모더니티의 다양한 양상을 구현해냄으로써 오랫동안 강력하면서도 유연한 시형식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영문학에서는 진지한 주제를 다루는 데 적합한 장치로 여겨왔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이래 아방가르드 자유시의 등장과 성공으로 무운시는 그 위상이 점차 흔들리고 있다.

C.
무운시는 압운시와는 그 구조가 다르다. 압운시가 대체로 동일한 수의 시행과 규칙적인 길이, 운율형식, 음보 등을 갖춘 연(stanza) 구분에 의존한다면, 보다 자유로운 무운시는 서로 다른 길이의 시단락(verse paragraphs)으로 구성된다. 압운체계는 비교적 짧은 길이의 시나 정형시에서 엄격할 수 있지만, 비극이나 서사시처럼 장시에서는 장애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는 암기의 편의상 두운을 구사하기도 했다. 반면, 무운시는 압운이 없어 어순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의도적 구문도치, 중간휴지, 고전 서사시의 전치 효과 등이 가능한 문체적 장치이다. 또한 이행연구(couplet)나 각운을 갖춘 연과 같은 제약에서 벗어나 장편의 시작(詩作)에 용이하여 자연스럽게 서사시나 시극에 적합한 수단이 된다.

무운시란 이론적으로는 약강의 2음절 5쌍으로 구성된 10음절이 한 행을 이루는 시형식이다. 무운시의 바탕인 약강5음보는 영어의 일상 구어투에 가장 가까운 리듬으로 알려졌다. 가령, 기계적 반복음인 시계소리가 한국어에서는 낱말강세가 미약한 ‘똑딱똑딱’으로 느껴지는 데 반해, 영어에서는 ‘틱톡 틱톡’으로 뒤 음절에 강세가 분명한 ‘약강’ 리듬으로 들린다. ‘똑딱’으로도 ‘틱톡’으로도 들을 수 있는 시계소리가 실제 음이 아니라면 영어에는 약강 리듬 감각이 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약강5음보는 ‘약강’이 자연스런 영어의 기본 리듬이고 사람들이 한숨에 말할 수 있는 길이가 대체로 10음절(5음보)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영어에 끼친 무운시의 영향은 일상영어의 자연스러운 리듬이기 때문에 무운시가 약강5음보를 구사하는지 아니면 역으로 무운시가 채택한 운율이 영어의 자연스런 리듬형식으로 정착했는지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아무튼 무운시는 시극의 대화나 극적 독백처럼 극형식에서 특히 많이 구사될 만큼 일상어와 친화성이 있다.

그러나 무운시가 일상어 리듬감과의 유사성만으로 영시의 주도적 형식이 된 것은 아니다. 대체로 약강5음보라고 해도, 수많은 변이와 굴절이 있는 느슨한 일상 영어에 비해 무운시의 리듬은 격식과 규칙성이 강하다. 시적 형식은 내용을 형성하고, 시적 경험을 일상과는 구별지으며 경험현실에 질서를 부여한다. 게다가 무운시가 약강5음보라 해도 실제로는 완벽히 약강 운율일 수도 엄격히 10음절일 수도 없다. 무운시가 약강 운율만으로 구성된 경우는 거의 불가능할 뿐 아니라, 가능하다 해도 그 단조로움 때문에 바람직하지도 않다. 무운시는 약강격(iambic)을 기본으로 강약격(trochee), 약약강격(anapest), 강약약격(dactyl) 등 여러 음보가 결합됨으로써 각 행이 9음절에서 11음절에 이르지만, 대체로 5개의 강세음절이 있어 사실상 5음보를 유지한다. 대체로 한 편의 시에서 그 시행이 5음보보다 적으면 노래처럼 들려 진지한 소재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는 가볍고, 5음보가 넘으면 중간휴지가 발생하여 작은 단위로 나뉘기 십상이다. 가령 6음보(hexameter)의 시행은 두 개의 3음보(trimeter)로, 7음보(heptameter)는 4음보(tetrameter)와 3음보로 갈린다. 이처럼 무운시는 일정한 길이의 시행을 확보하면서 한 시행의 운율을 다음 행으로 자연스럽게 이어간다. 이는 짧은 길이나 불규칙한 시행의 자유시와는 달리 서사적 목소리를 분명히 드러내고 독자들이 강하게 몰입되도록 한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현대시에서는 시행이 보다 짧아지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의 정서로는 무운시가 다소 웅변적이고 장중하며 느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Thomas Stearns Eliot, “Notes on the Blank Verse of Christopher Marlowe” The Sacred Wood: Essays on Poetry and Criticism, Methuen, 1980.
Alex Preminger, Terry Brogan et al (eds.), The New Princeton Encyclopedia of Poetry and Poetics, Princeton UP, 1993.
Robert Burns Shaw, Blank Verse: A Guide to its History and Use, Ohio UP,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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