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 1709-1784)
작가소개“지옥에 이르는 길도 선의로 포장된다.” “애국이란 악당의 최후의 도피처이다.” “무릇 남성은 아내가 그리스어를 말할 때보다 식탁 위의 훌륭한 저녁식사에 더욱 즐거워한다.” “바보 말고 누구도 돈 이외의 목적으로 글을 쓰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도 친숙한 수많은 경구를 통해 이데올로기라는 말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성장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양가적 태도로 간파한 통찰력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흠정역성경(the King James Version Bible)과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영어에 많은 인용어구를 보탠 사무엘 존슨은 영문학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문인(a man of letters) 중 한사람이다. 영국의 18세기후반을 “존슨의 시대”로 명명하게 한 장본인인 그는 또한 당시 확장되는 부르주아 계급의 대표적인 자수성가형의 삶을 살면서 영국적 요소(English- ness)의 한 자락을 이루는 아마추어리즘의 전형으로서 경험적, 실용적, 현실참여적 글쓰기로 일관했다. 이는 세계역사상 시장원칙에 부응하여 독서대중을 위한 글쓰기에 성공한 최초의 현대적(modern) 작가의 예에 해당한다.
존슨은 런던의 북서쪽 100마일에 위치한 리치필드(Lichfield)라는 소도시에서 연로하고 가난한 서적상의 병약한 아들로 태어나 3세 때 시를 쓰는 천재성을 보이며 자라 옥스퍼드대학에 진학했지만 대학생활 14개월 만에 부친의 죽음에 따른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중퇴했다(1731). 고향에 돌아와 한 학교의 안내원으로 일하다가 25세에 세 자녀가 딸린 21년 연상의 부유한 과부
(Elizabeth 'Tetty' Porter)를 만나 결혼하여 함께 학교를 설립(1735)하였지만 그에게 학위가 없어서 실패하고 만다. 1737년에 당시 인구 70만으로 유럽의 최대도시인 런던에 훗날 당대 최고의 배우로 성장하는 제자 개릭(David Garrick)과 함께 상경한다. 그는 런던에 매료되어 “런던에 싫증나면 삶 자체에 싫증난 것이다. 런던에는 인생살이가 제시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있다”라는 말을 남기지만 그의 초창기 런던생활은 “그럽스트릿(Grub Street)의 문인”으로 상징되는 무명과 빈곤의 세월이었다. 이 시절 그는 커피하우스(Coffee House - 차를 즐겼던 그는 훗날 한자리에서 25 잔의 차를 마시기도 함)의 시대에 성장하는 부르주와지를 겨냥한 『젠들맨의 매거진』(Gentleman's Magazine)과 같은 잡지의 편집에 관여하여 잡문을 써가며 시대적 감각을 형성하는 한편 훗날 그의 명성을 확립할 셰익스피어 전집과 영어사전의 편찬을 기획해나간다. 왕성한 필력으로 문학과 시대상에 대한 최상의 에세이와 명작으로 기억되는 시편 등을 사실상 그의 일인 정기간행물인 『램블러』(The Rambler, 1750-52)와 또 다른 잡지에는 ‘아이들러’(the Idler, 1958-60)라는 필명으로 발표하여 도덕주의자요 문장가로서 자신만의 독자층을 형성해가던 중에도 그가 지극히 사랑하던 아내의 죽음(1752) 등 시련은 계속되고 임종이 임박한 어머니의 장례비를 마련하기위해 쓴 우화(Rasselas, 1759)가 명작으로 남기도 한다. 그러나 영국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 중 하나인 사전편찬이 완성(1755)된 후 1762년부터는 왕(George III)으로부터 연금(300파운드)을 받게 됨으로써 존슨은 더 이상 생계를 위한 글쓰기에 매달릴 필요는 없게 된다. 이제 그는 버크(Edmund Burke), 골드스미스(Oliver Goldsmith), 기본(Edward Gibbon)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 함께 “문학클럽”(the Literary Club, 1764)을 결성하여 공공영역의 여론을 주도하게 된다. 이 시기에 영문학사상 영원히 기억되는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훗날 그의 평전(The Life of Samuel Johnson, LL.D, 1791)을 써서 전기문학의 위상을 설정할 보스웰(James Boswell)을 만난 일(1763)로서 존슨은 그와 함께 스코틀랜드를 여행(1773)한 후 여행기를 남겨 기행문학의 이정표를 세우기도 한다. 또한 셰익스피어의 작품 편집(1765)을 포함한 그동안 그의 업적이 인정되어 옥스퍼드대학으로부터 박사학위(DCL, 1775)를 받아 ‘존슨박사’(Dr Johnson)라는 영원한 명성을 얻는다. 그 후에도 그는 노년과 평생의 지병(우울증)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시인선집에 서문(1779-81)을 쓰는 등 왕성한 계몽적 비평활동을 통해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린 사교적인 삶을 영위하다가 어느 추운 겨울날 죽음을 맞아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묻혔다.
돌이켜보면 모더니티가 진전하면서 필연적으로 생산하는 유형의 지식인인 존슨의 경우에는 전기적 사실이 다른 누구보다도 많은 이해의 빛을 던져준다. 그의 생애자체가 시대현상으로서 가장 엄격한 기준으로 평가해도 삶과 문학이 하나였다. 당대는 부르주와 계급의 성장(성인 남성의 60%와 여성의 40%가 읽고 쓸 수 있게 됨)과 더불어 산문의 위상변화, 기존 후원제도의 와해, 급속한 인쇄산업의 성장 등과 같은 새로운 시대상황으로 인해 문학의 의의와 생산조건을 포함한 문학성(literariness) 전반이 변화 조정되어가고 있었다. 또한 사상사적으로는 일종의 복고적 반동인 신고전주의적 정형화의 시대에서 인간본성의 자연스러움과 상황에 따른 변화 가능성을 배재하지 않는 전기낭만주의가 교차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 변화의 시대에 그는 시를 포함한 창작, 저널 기고, 편집, 사전편찬, 평전 등과 같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문학시장에서 독서대중을 위해 상식(common sense)에 바탕을 둔 경험주의적 공공 비평가(a public critic)로서 시대적 관심사에 관여하고 직업작가의 위상을 설정하는 활동을 했다. 이처럼 비평의 상황의존성(circumstantiality)을 체현한 그는 ‘자연’과 ‘인간’, ‘일상언어’ 같은 보편성을 척도로 글을 써서 계몽과 오락을 겸비한 영국적 비평양식을 하나의 문학 장르로 승화시킬 뿐만 아니라 문학논의가 창작이론에서 독서이론으로 전향하는 오랜 비평의 역사에서 큰 획을 그어 사회적으로 비평을 의미생산의 주체로 자리매김한다. ‘형이상학파 시인’이란 표현을 만들어내며 명쾌하고 활기와 재치 있는 운문, 단정한 구도 등를 선호한 그의 기호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이후 영문학의 정전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영문학연구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의 귀착점이 된 모더니티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의해 관심의 대상이 된 18세기연구뿐만 아니라 현대비평의 출발점을 절대주의적 권력과의 투쟁에서 찾는 시각(Terry Eagleton)에서도 존슨을 논의의 중심에 두는 것은 당연하다.
작품연보
【시, 드라마, 창작】
『아이리니』(Irene, 1737) (운문 비극작품으로 1749년 Drury Lane에서 초연됨)
「런던」(“London: a Poem,” 1738)
「인간소망의 허무함」 (“The Vanities of Human Wishes,” 1749)
『아비시니아왕자 라쎌라스의 인생역정』(The History of Rasselas, Prince of Abyssinia, 1759)
「개릭의 서곡」(“Prologue Spoken by Mr Garrick,” 1747)
「레빗박사를 애도하며」(“On the Death of Dr Robert Levet,” 1783)
【비평】
「세비지의 생애」(“An Account of the Life of Mr Richard Savage,” 1744)
「영어사전 편찬계획」(“The Plan of a Dictionary of the English Dictionary,” 1747)
『램블러』(Periodical essays in The Rambler, 1750-1752)
『어드벤쳐러』(Periodical essays in The Adventurer, 1752-54)
『아이들러』(the Idler essays appearing in The Universal Chronicle, 1758-1760)
『영국시인평전』(The Lives of the English Poets, 1779-81)
【기행문학】
『스코틀랜드서부제도 기행』(A Journey to the Western Islands of Scotland, 1775)
【편집】
『영어사전』(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1755)
『셰익스피어희곡』(The Plays of William Shakespeare, 1765)
대표작
『영어사전』(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1755)
*표제어: 약 40,000 어휘
*인용문: 약 114,000 문장
1746년 거의 무영이나 다름없던 존슨은 상업적 필요를 느낀 5명의 런던 서적상들로부터 사전편찬 의뢰를 받는다. 이 당시 영국에는 외래어(주로 라틴어)와 전문용어의 뜻풀이 사전만이 존재했는데, 경제사회적 변화를 반영한 시대간의 단절뿐만 아니라 지역간, 계층간의 언어사용 차이 등 심한 언어의 혼란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존슨은 이와 같이 일종의 계몽적 시대정신의 소산인은 표준영어의 이념을 유지하려는 작업의 적임자였다. 그러나 이미 이탈리아와 프랑스 학술원의 사전편찬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그에겐 비교적 수월한 작업이었다. 프랑스에서는 40명의 학자가 40년의 기간에 걸쳐 완수한 작업을 존슨은 6명의 조수와 함께 9년에 이룰 수 있었고 고전에서 용례를 발췌한 이탈리아 사전의 선례를 따라 시드니(Sir Philip Sidney, 1554-86)이래의 작가들(주로 셰익스피어와 밀턴, 드라이든)로부터 모범적인 인용을 제시한다. 이는 독서배경이 빈약한 성장하는 부르주아계급의 교육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론이기도 하지만 존슨에게 영어의 ‘황금의 시대’는 특히 16세기말에서 1660년 왕정복고기까지였다. 언어는 항상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이후 영어의 변화를 그는 타락으로 여긴다. (이는 훗날 엘리엇TS Eliot과 리비스FR Leavis의 모더니티 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 그의 사전이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어원의 설명이 부족하고 표준발음의 제시가 없으며 때로는 편견과 시대적 한계를 반영하는 어휘풀이가 눈에 띠지만 훗날 웹스터(Noah Webster)는 존슨의 언어에 대한 공헌을 뉴턴의 수학에 대한 공로와 맞먹는다고 상찬한다. 아무튼 존슨의 기념비적 작업은『옥스퍼드영어사전』(OED)의 선구가 될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150년간 최고의 권위를 유지했다.
흥미롭게도 이 사전 역시 시대의 관심과 편견을 고스란히 드러내는데 이에 해당하는 어휘 중 하나로는 ‘public’이 있다. 존슨은 이를 다음과 같이 1. 공개적인, 널리 알려진(open, notorious, generally known); 여럿이 함께 이룬(done by many); 공동체의 이익을 중시하는(regarding the good of the community); 2. 국민(the people), 공개된 견해(open view); 일반적 고지(general notice) 등으로 풀이한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사심없음’(dis- interestedness)을 신조어로 제시했던 시대를 살던 존슨에게는 ‘public’이 사적 혹은 특정 이익과 대조를 이룸으로써 일종의 도덕적 가치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공중(the public)이란 단순한 사람들의 집단이라기보다는 선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20세기에 와서 독일 철학자 하버마스(Jurgen Habermas)가 공공영역(the public sphere)의 모델로 제시하게 된 18세기 영국사회에서 존슨은 이미 ‘공적인’(public)이란 개념을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당대적 이해를 제시한다.
「셰익스피어 서문」 (“Preface to Shakespeare,” 1765)
독서 대중이 성장함에 따라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기존의 견해와 자신의 독창적인 해설을 망라한 훌륭한 주석을 덧붙임으로써 공연보다는 읽기용으로 편집된 전8권의 『셰익스피어희곡』(The Plays of William Shakespeare)을 셰익스피어 연구에서 뿐만 아니라 비평사상 괄목할만한 업적으로 만든 유명한 서문이다. 편자들이 자신의 기호에 따라 마음대로 손질한 기존판본들(Nicholas Rowe, Alexander Pope, Lewis Theobald, William Warburton)의 철저한 비교, 대조를 통한 텍스트의 복원을 시도한 본문과 더불어 이 서문은 영문학비평사상 텍스트 비평의 시작이자 최초의 본격 문학비평문이기도 하다. 그동안 확립된 자신의 권위와 유장한 문체로 쓰인 존슨의 서문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한 무비판적 숭배를 배격하고 그 장단점에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함으로써 일반적 비평원칙의 제시로 나아간다. 돌려 말하면 존슨은 셰익스피어가 있었기에 당대를 넘어서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는 신고전주의의 완고한 규범이던 시간과 장소의 일치 원칙이 무너지는 시기를 살던 그는 무대 위의 사실적 모습은 인위적 규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의 상상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존슨은 셰익스피어의 재능을 성격묘사와 인간본질의 진실을 들춰내는 데서 찾음으로써 장르구분을 하지 않는 그에게 면죄부를 준다. 이제 셰익스피어는 학식을 갖춘 시인이라기보다는 생동감 있는 인물을 창조하고 인간정서의 전모를 표현한 “자연의 시인”이란 평가를 영원히 떨쳐버릴 수 없게 된다. 이는 서구 르네상스 이래 계몽주의의 후예인 존슨의 평가인데 그는 “보편적 자연의 정당한 재현만이 많은 사람들을 오래도록 즐겁게 할 수 있다(Nothing can please many, and please long, but just re- presentations of general nature)”고 말함으로써 불변하는 인간본성, 삶의 원리로서의 ‘자연’을 비평적 판단기준으로 제시한다. 이런 기준을 형성하는 데는 “보편적 언어”를 통하여 “보편적 인간성의 진정한 자손들”(등장인물)을 창조함으로서 “풍속과 삶에 충실한 거울”을 비춘 “자연의 시인”셰익스피어가 있었던 것이다.
작품번역
『영미시총서』(탐구당) 등에 존슨의 시 몇 편 번역되어 있음.
국내해설서
이시연. 「쌔뮤얼 존슨」. 『영미문학의 길잡이1: 영국문학』. 영미문학연구회편. 서울: 창비, 2001. 230-39.
정정호. 「사무엘 존슨의 대화적 상상력 - 영국문학비평의 “위대한 전통”」. 『세계화 시대의 비판적 페다고지』. 서울: 생각의 나무, 2001. 22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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